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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부정론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야기 1



 현재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루어낸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음모론이 널리 유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은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사실 비합리적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증명되지 않은 주장이나 불명확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매우 쉽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류 문명이 생긴지 적어도 5000 - 6000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과학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은 갈릴레이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불과 500 년도 안되는 역사를 가질 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과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 쉽지많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가장 증가한 시기에 갖가지 음로론이나 사이비 과학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은 좋게만 볼 수 있는 일은 아닌 듯 합니다. 하지만 음모론이나 사이비 과학 중에서도 특별히 사회적 낭비나 해를 끼치지 않는 것들 - 예를 들어 혈액형과 성격이 관계가 있다는 주장 - 이 있는가 하면 지금 소개할 에이즈 부정론 처럼 아마 21세기 음모론 가운데 가장 엄청난 인명 손실을 야기한 이론들도 존재합니다. 


 에이즈 부정론 (AIDS Denialism) 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HIV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 가 AIDS 의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AIDS 란 질환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개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흔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의 근원은 1980 년대 HIV 가 AIDS 의 원인임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소수 과학자들은 AIDS 의 원인이 다른데 있지 않은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는데 사실 이는 과학적 증명 과정에서 흔히 존재할 수 있는 논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과학적 가설이 검증되고 난 이후 과학적 정설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죠. 


 이 경우에는 아주 소수의 과학자들이 심지어 90 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HIV 가 AIDS 의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왔던 것인데 현재는 사실상 과학계에서 이런 주장이 퇴출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이곳저곳에 아직도 HIV 가 AIDS 가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HIV 부정론자 (HIV Denialist) 라는 유산을 남기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HIV 부정론은 그냥 음모론의 일부로 생각되어 각국의 보건당국에 거론하거나 참고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만 이를 검증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없는 일반인 그룹 중 음모론 지지자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지구상에서 한 국가가 이 HIV 부정론을 국가적으로 채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물론 그 국가란 제목에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South Africa) 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000 년으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1999 년 넬슨 만델라의 뒤를 이어 남아프리카 대통령이 된 ANC 의 타보 음베키 (Thabo Mvuyelwa Mbeki) 는 2000 년 7월 9일 더반에서 열린 국제 에이즈 컨퍼런스에 참석해 에이즈가 HIV 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가난과 영양실조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1999 - 2008 년 재임) 타보 음베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Antonio Milena/ABr


 타보 음베키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세계에서 HIV 양성 반응자가 가장 흔한 국가였습니다. 대략 1990 년에는 0.7% 정도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임산부 중 HIV 양성 반응자가 1999 년에는 22.4% 에 달해 HIV 확산 저지와 에이즈 관련 이슈는 이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습니다. 


 따라서 많은 NGO 및 국제 기구들이 남아프리카에서 더 이상의 에이즈 확산을 막고 특히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에서 HIV 전파를 예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나온 음보 타베키 대통령의 발언은 모두에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HIV 의 감염 예방 및 역학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포스팅 참조 


 2000 년 9월 20일 남아프리카 의회 발언에서도 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이 내용을 반복했습니다. 

All HIV/AIDS programmes of this government are based on the thesis that HIV causes AIDS. [But...] can a virus cause a syndrome? ... It can't, because a syndrome is a group of diseases resulting from acquired immune deficiency. Indeed, HIV contributes [to the collapse of the immune system], but other things contribute as well. (by Mbeki) 

 이 주장을 요약하면 에이즈가 발생하는 원인은 HIV 란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여러가지 다른 질환, 특히 남아프리카에 만연된 극도의 가난에서 유래되는 영양 결핍이 그 주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HIV 부정론자들의 큰 지지를 받았으며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 음모론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는 것은 물론 이 내용을 담고 있는 페이크 다큐들을 제작하여 이 사이비 과학을 널리 전파하는데 주력했습니다. 반면 더반 회의에 참석한 5000 여 명의 과학자와 의사들은 HIV 가 AIDS 의 명확한 원인이라는 더반 선언에 서명해 공식적으로 이 주장에 반박했습니다. 


 왜 타보 음베키가 이런 주장에 동의했는지는 정확히는 그만이 알겠지만 아마도 의료 부분에 투입되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의도와 더불어 실제로 그 자신이 HIV 부정론자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HIV 가 AIDS 의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으니 그 다음 행동은 HIV 확산 저지는 물론 HIV 에 대한 치료 -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 (ART : Anti Retrovirus Therapy, 여기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팅 참조   http://blog.naver.com/jjy0501/100156931657) - 에 대해서 제동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이전 에이즈 관련 포스팅에서 설명했듯이 상당수의 HIV 전파는 콘돔 사용을 통해 차단이 가능하며, 산모에서 아기로 전파되는 수직 감염 역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 및 모유 수유 금지등을 통해 1-2% 까지 억제가 가능합니다. 또 진보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로 인해 오늘날 새롭게 진단 받은 HIV 양성자의 예상 수명은 20 년이나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고가의 치료를 받기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흑인들은 매우 빈곤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여러 NGO 및 국제 기구의 도움이 쇄도하고 있었고 보건 당국 역시 콘돔 사용과 관련 교육 처럼 비용이 적게 들지만 효과적인 예방법을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HIV 부정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타보 음베키 대통령의 이 황당한 주장은 그가 임명한 보건부 장관인  Mantombazana 'Manto' Edmie Tshabalala-Msimang 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수행됩니다. (발음이 복잡해 보이는데 만토 짜발랄라 - 음시망이라고 읽는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그냥 만토 장관이라고만 하겠습니다) 그녀는 남아프리카의 여성 정치인으로 특히 에이즈를 항레트로 바이러스 치료가 아닌 마늘과 홍당무 같은 민간 요법으로 치료하려 시도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이 길어져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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